KIC 글로벌 기자단 소식
<엑스오, 키티>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재현하는 한국, 보편으로서 한류
- 허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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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한풀 꺾인 듯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열기지만, 길을 걷다 "소다팝"이나 "골든"이 스쳐 들릴 때면 한류의 파워를 새삼 실감한다. 개인적으로 '케데헌' 이전에 "한국이라는 상품"의 힘을 강하게 체감한 순간은 슬로베니아에서 <엑스오, 키티>(2023)를 보았을 때였다. 당시 내가 보던 슬로베니아 넷플릭스에서 상위권을 오래 지키던 작품이 바로 그 드라마였다.
'케데헌'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둘로 갈리는 듯했다. 한편에는 작품을 곧이곧대로 즐기는 대중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기존 '한류'를 견인해 왔거나 그 주체가 되기를 욕망했던 집단-이를테면 학계-이 있다. 두 집단이 내는 메시지는 얼핏 비슷하지만, 미묘한 뉘앙스에서 갈린다. 그럼에도 공통의 기반이 있다. 글로벌 플랫폼에서의 가시적인 성과라는,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여기서 내가 처음 던진 질문은 "저 작품의 국적은 무엇인가"였다. 영화와 드라마 등 문화산업에서 국적을 묻는 일은 근본적으로 의미가 희박하다. 문화가 산업의 논리에 포섭되면서, 구체적으로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문화산업'이라 명명하며 경고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제작, 배급, 소비의 회로는 처음부터 초국가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동시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경고로부터 벤야민은 미키 마우스를 통해서 획일화의 위험과 동시에 경계가 흐려지며 열리는 새로운 해방 가능성을 보았다. 자본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제작, 출연, 소재, 배급이 각기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는 작품 앞에서 "국적"을 단정하는 일은 점점 공허해진다.
그렇다면 왜 '케데헌'을 둘러싼 당혹감이 생겼을까. 핵심은 이것이 "케이팝 영화"라기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적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논의가 종종 케이팝의 파급력에만 수렴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이 오랫동안 비주류 취급을 받았던 역사적 맥락도 이 편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구나 '케데헌'은 제작 주체가 한국이 아닌 글로벌 스튜디오이고, 배급 또한 글로벌 플랫폼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기존 케이팝 성공 서사와 궤를 달리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한국 소속사"라는 환상 속에서 혼종적 기획에도 한국성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자본의 확장성과 플랫폼의 복합성은 "기업의 국적"을 해체시킨다. 엄밀히 말하면 '케데헌'은 '케이팝(K-pop)'을 소재로 삼은 애니메이션 영화다. 이러한 구분은 사소해 보이지만 놓치면 안 될 부분이다.
사실 이 당혹감은 '케데헌' 직전에 이미 감지됐다. <엑스오, 키티>가 그 전조라고 본다. 이 작품은 한국계 미국 작가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의 스핀오프로, 공개 직후 글로벌 상위권을 오래 유지했다. 주인공은 한국계 미국인 소녀지만, 배우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배경 역시 서울에 있는 가상의 국제학교(KISS)지만 학교의 제도나 미장센 등은 미국의 사립학교에 더 가깝고, 드라마의 전개는 미국 하이틴 장르의 문법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한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한국이 없는 한국"이 재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분기점이 생긴다. 케이팝을 "한국 대중가요"로 환원해 이해하던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케이팝이 산업으로 성장하며 글로벌 유통망 속에서 다른 의미로 소비되자, 한류 역시 "K-wave"라는 이름의 보편적 기표로 번역 및 상품화되었다. 문제는,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이 부재한 한국"이 표준화된 형식으로 재현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팔리기만 하면 됐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한류가 문화상품의 최전선에 선 이상 우리는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넘어 "어떤 담론을 주도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질문은 한국 내부만의 과제가 아니다.
나는 "한국이 없는 한국"을 단순히 문화산업의 부작용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것은 재외동포와 비한국인 혹은 외국인 창작자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다중적 한국성"의 현장이다. 미국계 한국인, 슬로베니아계 한국인, 베트남계 한국인, 혹은 그냥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인까지-국적과 언어 그리고 문화 자본이 얽혀 탄생하는 "변이된 한국들"은 더 이상 돌연변이가 아니라 규칙에 가깝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한국은, 그리고 세계의 한국인들은, 이 다중적 한국성을 어떻게 환대하고 조직할 것인가. 간략하게나마 정책적인 제안을 생각해 본다면, (1) '로컬-디아스포라-한국' 으로 이어지는 공동제작을 위한 마이크로펀드 조성 (2) 팬덤 및 커뮤니티 실천에 대한 분산 아카이브 구축 및 저작권 가이드, (3) 해외동포 세대연결 프로그램 등이 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한민족회의가 고민해야 할 과제가 분명해진다. 한류는 더 이상 본국에서 해외로의 수출이라는 일방향적인 수출품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곳곳의 한민족과 현지 시민들이 함께 엮어 가는 '민족적 상상력의 장'에서 생산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류가 보편이 되는 순간, "누가 더 진짜 한국인가"의 서열화는 무의미해진다. 대신 "서로 다른 자리에서 만들어진 한국적 경험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증폭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한류에 대한 담론 생산에 그치지 않고 동포사회의 경제 생태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산업적, 제도적 도움이 조금만 받쳐진다면 더 다양한 결과값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한인회와 로컬 파트너를 연계시키는 마케팅이나 저작권과 상영권한 등에 대한 간소화, 지역 한류와 연동된 소액 후원과 티켓 매칭, 동포기업 스폰서십과 같은 작은 장치들은 생각보다 더 실현가능한 제안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한류는 앞으로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만이 아니라 "한국계" 동포들과 "한국을 함께 만드는 외국인"까지 포괄하는 어휘와 서사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이름의 기능적 변경은 환대의 실천이라는 출발선을 만든다. 이러한 정의로부터 우리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민 1세대와 2·3세대가 이해하는 한류에 대한 상호 번역, 혹은 '가정 내 번역'을 '공적 기억'으로 전환시키는 통로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외에도 풀뿌리 식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한류를 어떻게 연결할지를 고민한다면, 이를테면 '한국-디아스포라-현지 창작자'로 이어지는 소규모 공동 제작 지원 등은 혼종적 한국성이 추상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한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의 시작점은 "한국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우리가 세계와 무엇을 공명시킬 것인가"로 확장되어, 추후에는 노동, 환경, 젠더 등 글로벌 의제와 접속하는 한류로 이어질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한류는 더 이상 취향이나 상품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한류를 매개로 한 느슨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플랫폼이 될 것이다.
한국은 더 이상 지정학적 경계에 갇혀 있지 않다. 세계 곳곳의 한민족과 그 이웃들이 공유하고 즐기고 있는 '증상'이다. 변종을 배제하는 대신, 그 변종들을 보편적 증상으로서 혹은 시대가 우리에게 건네는 신호로서 읽어 낼 필요가 있다.
결국 <엑스오, 키티>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보여 준 것은 "한국이 없는 한국"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한국이 어디서나 한국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일 것이다. 현재의 한류에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한국만의 상상력이 아니라 한류를 매개로 한 세계 시민들이 함께 발명하는 상상력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생각보다 간단해질 수 있다. 이미 시작된 미래를 뒤따라 설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앞서 설계하는 것이다.
슬로베니아 기자 허의진